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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가 보낸 편지(2) - 페미가 실천가능 선본에게~

[여성주의]


페미가 보낸 편지 part2 
페미가 실천가능 선본에게




‘실천가능’ 선본에게


  안녕? 너희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려니 참 어색하기 그지없구나. 아, 우선 내 소개를 해야 하는 건가? 글쎄 너희에게 나를 뭐라고 소개하면 좋을까? 뭐 그냥 ‘학관에 상주하는 고학번 페미’ 정도라고 해두자. 너희는 나의 존재를 잘 모를 테고 관심도 없겠지만 우리 사실은 학관에서 되게 자주 마주치더라? 우리가 인사라도 하는 사이였다면 지금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게 이렇게 어색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  

   사실 말이지, 이번 선본 포스터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살짝 놀랐단다. 지난 선거 때 ‘실천가능’이라는 이름이 조금 민망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너희가 또 그 이름 그대로 포스터를 찍어버렸기 때문이지(물론 다른 선본들 이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지만). 뭐 살짝 반갑기도 했단다. 원래 나는 참 다정(多情)한 페미 거든! 어쨌든 작년과 같은 이름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물론 너희는 올 한 해의 활동에 대해 학우들에게 평가받고 싶다고 겸손을 떨었지만, 에이 뭐 그래도 솔직히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까 그 이름 또 쓰는 거 아니겠니? (아니면 말고 흥) 

   그래 뭐. 올 한 해 너희들 참 열심히 사는 것 같더구나. 정확히 너희가 뭐에 그리 열심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미안 내가 좀 바빴어. 아님 너희가 베풀어준 ‘복지’가 ‘페미’인 나에게까지 돌아올 만큼 충분하진 않았거나) 학생 ‘복지’에 최선을 다 하는 너희 모습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난 너희가 이번 선거에 또 다시 ‘실천가능’이란 이름으로 나왔다는 점을 이해해줄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이번에 너희가 또 당선이 되더라도 난 크게 불만은 없어(그렇다고 같이 기뻐해줄 수도 없겠지만). 어차피 맘에 딱 드는 선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니들이 뭔가 나름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기특하거든. 

  기왕 이렇게 어색한 편지를 시작한 김에 나 사실 니들한테 섭섭한 게 좀 있었는데, 이참에 이야기해도 될까? 앞으로 내가 언제 또 너희한테 이렇게 멋대로 반말 써가며 편지를 쓸  수 있겠니. 좀 빈정 상하더라도 그냥 참고 읽어줘. 

   작년에 너희가 ‘여휴 개선/ 남휴 신설’ 이란 공약을 내걸었을 때 나를 비롯한 학내 페미들은 당황스러웠어. 물론 학내에 학생들의 휴식 공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거, 돈 안 내고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거, 우리도 모르지는 않아. 남학우들을 위한 휴게실이 필요하다는 점에도 동의할 수 있어. 그치만 저렇게 ‘여휴/남휴’로 나눠버리면 꼭 ‘여자 화장실/남자 화장실’처럼 느껴지지 않니? ‘여학생 휴게실’이라는 공간이 담고 있는 정치적 의미(이제 좀 입 아프니 다시 얘긴 안 할게. 너희 스스로 관련 자료 정도는 찾아볼 수 있겠지?)와 그 공간을 만들기 위한 학내 페미들의 지난한 투쟁 과정 등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리는 것 같잖아 그럼. 물론 너희 눈에는 여휴가 복지 차원의 공간으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데 말이지. 

   어쨌든 그래서 우린 너희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단다. 그리고 너희의 얘기를 듣고 싶기도 했고. 니들이 항상 말했었잖아. 무슨 일이든지 학우들의 목소리를 듣고,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하겠다고. ‘남휴’의 필요성과 의미에 대해, ‘여휴’라는 공간의 의미에 대해 너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는 것, 더 많은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 그래서 우린 나름 모여서 회의도 하고 자보도 붙이고 그랬었지. 근데 니들, 그 자보들을 못 봤던 건 아닐 텐데 우릴 그냥 무시하더라? 설마 진짜 못 본거니? 무척 게으른 우리들이지만 나름대로 노력했었는데 말이지. 너희가 반응이 없으니까 우린 좀 민망해져서 그렇게 그 일은 흐지부지 끝나버렸지. 만들기로 한 건 너희들인데, 우리들끼리만 계속 떠들기는 뻘줌 했거든. 

   그리고 사실 한참동안 그 일을 까먹고 있었어. 사람이 다 그렇지 뭐. 사는 게 바쁘다보면 깜박깜박 하잖아 원래. 어라,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라니? 어느 틈엔가 니들 ‘남휴’를 만들었다고 홍보하고 있더구나. 물론 어디 구석진 곳에 딱 하나뿐이긴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학우들’과 ‘의견 수렴’을 해버린 거니? 아님, 이건 그냥 ‘복지’ 차원의 문제니까 의견 수렴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니? 나 그래서 참 많이 섭섭했어 니들한테. 너희와 다른 생각을 가진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거야? 학생들은 그냥 너희가 해주는 거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님 나는, 나를 비롯한 페미들은, 니들이 말하는 ‘일반 학우’가 아닌 건가?

   작년 선거 때 이미 눈치 채버린 일이긴 하지만 너희에게 ‘여학생’은 그냥 ‘학생’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듯 해. 중고딩 시절 양성 평등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러는 거니? 여전히 여성이기 때문에 경험해야 하는 특수한 문제들이 학교 안과 밖에서 수두룩 빽빽한데, 그건 그냥 ‘불공평’의 문제, 그러니까 복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닌 건데, 니들 눈에는 그런 게 잘 안 보이나봐. 여학우들에겐 발 마사지기 말고도 필요한 게 많단다.[각주:1] 그 문제들을 니들한테 해결해 달라고 투정부리는 게 아니라, 최소한 여성이 여전히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공감하는 총학생회가 되어야지 나를 비롯한 페미들이 학교에서 뭐 좀 맘 놓고 해볼 수 있지 않겠니? 우린 돈도 없고 사람도 적고 ‘빽’도 없는데 말이야.
   
  엄훠, 나의 섭섭함을 주절거리다 보니 갑자기 내가 좀 불쌍해지는 거 같네? 하하. 사실 뭐 그냥 그랬다는 거지 그게 엄청 섭섭했다거나 내가 깊은 상처를 받은 건 아니란다. 니들 보기엔 학내 페미들 뭐 개뿔 하는 것도 없어 보이겠지만 우리도 나름 우리 일로 바쁘고 또 항상 즐겁거든. 안 좋은 일은 그냥 얼른 잊어야지 뭐. 

   그래도 내가 이렇게 시간과 종이와 잉크를 낭비해가며 너희한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이번 선거 때는 니들이 좀 더 많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복지’로 환원해버릴 수 없는 이야기, 여러 지점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고민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란다(물론 니들끼리가 아니라, 나와, 우리와 함께 말이지). 만약 너희가 또 당선된다면 우리 앞으로 일 년을 더 학관에서, 그리고 학교 안 이곳저곳에서 부딪혀야 하는 거잖아. 기왕이면 서로 웃는 얼굴로 인사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게 좋지 않겠니? (페미들도 좀 웃으면서 학교 다니고 싶단다.)

  어쨌든 날씨도 점점 추워지는데 여러 가지로 수고들 많다. 선거 운동 열심히 잘 하렴. 그럼 내 편지는 이만 줄일게. 


2008년 11월. 학관에 상주하는 나름 바쁜 고학번 페미로부터. 



추신. 너희 선본에게 이렇게 따로 편지를 쓰는 이유는, 너희가 가장 훌륭하다거나 특별히 내 눈에 예뻐 보여서는 아니란다. 이런 분위기가 정말 싫지만 사람들이 자꾸 운동권/비권으로 나눠서 얘기하니까 뭔가 유일한 ‘비권’으로 언급되는 너희에게 따로 편지를 써야겠다 싶었던 거야. 사실 내가 보기엔 지금 선거판에서 소위 ‘운동권’과 ‘비권’이 뭐 그리 크게 다르지도 않은 것 같지만 말이야.
  1. 뭐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면, 근데 뭐가 필요하다는 건지 궁금하긴 하다면, 연락하렴! 난 너희와 가까운 곳에 있단다 호호. [본문으로]